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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EFP 2013. 2. 18.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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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강신주-윤영호-심보선] <죽음이란 무엇인가> 대담 ①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확실한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사람은 모두 OO 한다' 혹은 '모두 OO을 갖는다'는 틀림없는 명제 말이다. 아마 "사람은 모두 죽는다"라는 익숙한 명제가 떠오를지 모른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로 이어지는 유명한 삼단논법 예문이 자동으로 재생될지 모른다.

이 예문은 삼단논법 그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거의 모든 인류에게 공유되어 있다. 그만큼 참인 결론을 위해 서 있는 대전제, 즉 '사람은 모두 죽는다'라는 명제가 확실하다는 얘기다. '철학에서의 확실성에 대한 논증은 그만큼 죽음의 확실성에 기대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확실하고 오래된 참 명제는 일상 영역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누구나'처럼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 문제일수록 '나의' 것이라는 감각을 떠올리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대중매체와 제도교육을 통해 별다른 검토 없이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이미지와 유쾌하지 못한 주제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누구나'의 것, 즉 자기의 것인 죽음을 몰아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말에 출간된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박세연 옮김, 엘도라도 펴냄)의 조용한 인기는 주목할 만하다. 저자가 20년 가까이 예일대학교에서 진행해온 교양철학 강좌 '죽음(DEATH)'을 재구성한 이 책은 과거를 돌아보는 세밑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 출간돼 호응을 얻었고, 해를 넘어서도 입소문을 타 9만 부 가까이 팔렸다. 책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 매우 오랜 시간 철학적 논증의 도전 대상이 되어 왔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며, 다양한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커다란 질문은 여러 갈래로 뻗쳐 나올 수 있다. 또 다양한 접근 방식을 취할 수 있다. 케이건은 분석철학적인 입장에서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됐다'는 이원론과 물리주의(physicalism)를 논증의 토대로 삼고 "죽을 수밖에 없는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영혼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는가?", "죽음은 나쁜 것인가?", "자살은 합리적 선택인가?" 등의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신중한 검토를 마치고 '죽음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라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507쪽)

우리가 밀어내 온 죽음은 삶의 문제다. 그렇다면 저자가 요구한 삶과 죽음에 대한 숙고를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케이건이 던지는 화두를 일상 영역에서 복권시키면서, 그와는 또 다른 접근법으로 죽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시도로 <죽음이란 무엇인가> 특별 대담회가 지난 13일 저녁 역삼동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렸다.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죽음' 바로 알기'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대담회에선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놓칠 수밖에 없는 국내적 맥락을 포괄함은 물론 상이한 개인적·학자적 접근법을 드러내 줄 수 있는 네 명이 사회자와 대담 패널로 강단에 올랐다. 대구사이버대학교 교수이자 영상을 통한 심리치료를 진행하고 있는 영화평론가 심영섭이 사회자로 나섰고, <철학이 필요한 시간>(사계절 펴냄)의 철학자 강신주·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심보선·'존엄사' 문제를 공론화하고 있는 의사 윤영호(서울대학교 교수)가 패널로 참석했다.

 
네 사람은 책에 대한 감상과 죽음과 관련한 개인사적 견해, 학자적 관심사에 있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도 '죽음은 결국 삶의 문제'라는 케이건과 같은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또한 죽음을 어떻게 직시하고, '어떤' 죽음을 좀 더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율 1위라는 한국에서 자살은 왜 이토록 방치되고 있는가? 이 책처럼 공리주의적 접근법을 토대로 합당한 자살을 구별할 수 있을까? 한편, 이른바 '사회적인 죽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막을 수 있을까?

<프레시안>은 이 기획 대담의 주요 내용을 테마 별로 재구성해 3회에 걸쳐 전한다. '자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가치 있는 삶을 위한 관계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로 이어질 첫 번째 기사의 주제는 책 제목과 같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다. <편집자>

 

 

죽음에 대한 '논증'을 시도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심영섭 교수는 "이 책은 죽음에 관한 이성과 논리로 촘촘하게 엮인 그물망"이라 소개하며 패널들의 감상을 물었다.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시절부터 관심을 갖고 철학 공부를 했다는 윤영호 교수는 "나름대로 의료 윤리와 관련한 철학에 대해 공부해 왔다고 생각했으나, 이 책을 보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실제적인 고민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답했다. 또 "(죽음과 관련한 논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논리적으로 설계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강신주 박사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해 온 죽음에 관한 많은 논의를 풀어준 것이 미덕이며, 영미 분석철학 특유의 명료함이 장점이다"라고 평하면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죽음에 관한 서양의 논의로는 영미철학보다 독일과 프랑스 철학적 토대를 더 높게 평가한다고 밝혔다. 또 인생 대부분의 영역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듯 죽음 역시 기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문제라고 역설했다.

심보선 시인은 "최근에 죽음에 대해서 10분 정도 가만히 생각을 해 본 분이 있느냐"고 좌중에 질문을 던진 뒤, 이 책이 그 작업, 즉 죽음에 관한 심사숙고를 가능케 해 준다고 평했다. 책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단어가 '심사숙고'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가장 안 나오는 단어가 '사회'인 것 같다"며 이른바 '사회적인' 죽음에 대한 고찰이 빠진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

패널들의 평가가 일부에서 엇갈리는 이유는 이 책이 분석철학의 토대 위에서 철저하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죽음에 접근하고 해답을 내리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케이건은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 죽음에 관한 심리학적·사회학적 접근을 배제하고,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인간은 모두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 "가까운 이의 죽음과 그 슬픔의 장면" 등 다른 죽음 관련 책들에서 다루는 논의를 뺐다.

책은 전반부에서 영혼, 죽음의 본질, 영생의 가능성에 관한 질문들을 다룬다. 저자는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와 같은 질문을 예로 든다. 만일 육체와 별개로 비물질적인 영혼이 존재한다면 육체의 죽음 뒤에 벌어지는 일도 '나의 것'으로 감지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저자의 표현대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인 셈이다.

'물리주의자'인 케이건은 이 물음에 대해, 인간의 본질이 영혼이 아니라 육체임을 논증한다. 그는 인간이 기계에 불과하지만, 그냥 기계가 아니라 고도로 복잡하고 특별한 기계이며 죽음은 그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것이라 본다. 그리고 이런 검토 위에 후반부에 '가치' 문제를 논한다. 사후에 아무 것도 없다면 죽음이 '나쁜' 것이라 할 수 있는가?(9장), 언젠가 필연적으로 멈출 '기계'임에도 인간으로서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11장), 그렇다면 자살은 합리적인 선택이거나 도덕적으로 정당한 일이 될 수 있는가?(14장) 등이다.

 

 

우리가 겪은 '너'의 죽음

 

대담은 이러한 책의 입장에 구애받지 않고 '죽음'이란 주제 일반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면서도 책 뒤에서 다룬 가치 문제를 거쳐 갔다. 심 교수는 두 번째 질문으로 패널 각자에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경험들과 죽음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세 사람은 각자의 경험과 학자적 관심사에 따라 케이건과는 또 다른 내용의 죽음에 관한 화두를 꺼냈다.

 

윤영호 교수는 가장 먼저 자신의 중학생 시절, 스물네 살이던 누나가 위암으로 돌아간 경험을 떠올렸다. 이미 암세포가 간에도 전이되었다며 병원이 손 쓰기를 포기한 시점,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소년 시절의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두 번째로 떠올린 경험은 의대 본과 4학년 때 자원봉사에서 만나 가까워진, 말기 암 환자의 죽음이었다. 당시 40대였던 환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고, 마치 친족의 죽음처럼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의사로 성장하여 지금도 의료 현장에서 많은 '실제 죽음'과 마주하고 있는 그는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동안 가족들이 받는 고통과 죽음 이후에 부딪치는 상처를 어떻게 경감시킬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 할 수 있는 정책적 방법"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라는 개인적 차원의 방법, 두 가지 면에서 이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심보선 시인은 "수해로 인해 죽은 사람들의 발"을 수시로 목격하던 망원동의 유년 시절부터 죽음이란 이미지에 강렬하게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러던 그에게 굉장히 '부조리'한 경험이 닥쳤다. 병에 걸린 할머니로 인해 악몽에 시달릴 정도로 죽음을 생각하던 그는, 다니던 기독교 중학교의 예배에 나가게 되었다. 첫 예배에 진지하게 참석하며 죽음에 관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반말을 했다는 사소한 이유로 학교 선배에게 얼굴을 맞게 된다.

얼마 뒤 그는 신문에서 한 중학생이 한강에서 아이를 구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사를 읽는다. 사망자는 첫 예배에서 그를 때린 선배였다. 기사에는 그 학생에 대해 '모범생이었다'는 평이 실려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심보선 시인은 "내가 죽음에 관한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한 그 순간, 죽음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계시처럼 닥친 상황이었다"며 "그때부터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는 내게 있어 판단중지의 영역이다"라고 말했다.

강신주 박사는 '나의 죽음'을 잊고 '너의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죽음을 1인칭, 2인칭, 3인칭의 죽음으로 구분한 뒤 자기 자신의 죽음(1인칭의 죽음)에 과도하게 사로잡히는 세태를 경계했다. 자신의 죽음에 집착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을 볼 기회를 잃고, 그는 또 "우리가 죽음을 힘겨운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가) 살아 있던 동안에 있던 관계와 나눈 사랑이 지워지는 느낌 때문이다"라며 "죽음은 떠날 때 사랑하던 사람의 손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죽음은 '나쁜' 것인가?

 

앞에서 말한 대로 죽음은 유쾌하지 못한 주제다. 세 사람의 개인사 속에서도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지우거나 눈물을 흘리게 하거나 부조리한 경험으로 기억됐다. 그러나 이 책에서 케이건이 직접 논증에 도전한 것처럼 '죽음은 나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렇지만은 않다는 답이 나왔다.

케이건은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초반부의 결론을 토대로 이 질문 앞에 곧장 달려 나간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초점을 '살아있는 사람들(남겨진 자)'에게 맞추지 않고, '죽은 이'에게 맞춘다. '비존재(nonexistence)'가 어떻게 내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반론을 소개하고 반박하면서도 "죽음이 나쁜 이유는, 죽고 나면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축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어서"라는 '박탈 이론'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 방식이라고 말했다.

앞서 죽음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어 케이건과는 다른 맥락을 드러낸 대로, 이 질문에 대한 잠정적 결론 역시 세 사람은 다소 다르게 접근해 도출했다. 강신주 박사는 그것이 '누구'인가에 따라 다르다는 입장이다. "우리가 타인을 위해 살 때,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편안한 휴식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죽음이 나쁘기만 한 걸까요. 해답은 여전히 삶에 있습니다. 삶이 남루하면 죽음이 무섭게 다가올 겁니다. 인간답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삶을 연장하려고 하죠. 하지만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늘 어깨에 메고 살아가다 보면 눈 감을 때 '내려놓아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편해질 겁니다."

 
윤영호 교수는 "아마 누구도 죽음을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운을 뗀 뒤 셸리 케이건이 '죽음은 나쁜 것인가'를 논할 때 제외시킨 '남겨진 자'의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펼쳐 나갔다. 죽음은 살아있는 자에게 누군가를 잃는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나쁜 것'이지만 그것이 필연적인 이상 숙명을 받아들이고 다시 삶의 문제, 인간의 조건을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다.

"여러분이 만약 갑자기 며칠 뒤에 죽을병에 걸렸다고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를까요. 제 경우엔 첫 번째가 가족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없더라도 소중한 사람들이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힘, 그러니까 희망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겠죠. 그러면 또 다시 자신의 삶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누구나가 떠나는 순간에 그런 걱정을 하게 하는 사람, 혹은 믿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기를 바랄 것이고 그런 관계 속에서 죽음은 고통스럽겠지만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는 역설을 지니게 됩니다."

 

 

죽음을 생각한다 : 인간의 조건

 

심보선 시인은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비존재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비존재라는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라는 이 책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또한 비존재는 내가 움켜쥘 수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죽음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떠나 거스를 수 없는 숙명임을 에둘러 지적하면서, 그는 질문을 우회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에 누군가를 떠올립니다. 자살을 앞두고 유서를 쓰는 것 또한 말을 건네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한 후배가 자살에 대한 박사논문을 쓰면서 사람들의 유서를 분석했는데, 제게 들려준 얘기 중에 잊을 수 없는 게 있었어요. 어느 노인 분이 유서에서 큰 아들이니 며느리니, 가족들에게 꼼꼼하게 말을 전했어요. 그러면서 손주에게는 '(내 죽음을) 기말고사 끝나고 알려줘라'라고 썼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듣고 저는 '죽는 순간에까지 자기 손주의 기말고사를 걱정하는 이 마음은 대체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도 '죽으면 아무 것도 없다'는 에피쿠로스의 문장이 인용되어 있지만, 죽은 다음엔 책임감을 느낄 수 없는 마음도 없잖아요.

그런데 죽는 순간에까지 죽은 다음의 일, 손주의 기말고사를 걱정하는 이 마음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저는 이것이 사람들이 늘 어떤 관계 속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일화를 마치며 "죽음이 어떤 이익을 낳고 어떤 손실을 낳는가 하는 계산법은 죽음에 대해 큰 성찰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관계 속에서 죽음을 파악하는 것은 언제나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만의 능력이라면서 이 능력을 유지해 달라고 당부했다.

 

 

기획 대담 -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죽음' 바로 알기' 다음 기사는
②자살과 '사회적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2월 19일 화요일)
③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이를 위해 어떤 관계를 만들어야 하나 (2월 20일 수요일)
순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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